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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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회개하기에 지나치게 늦은 때도, 지나치게 이른 때도 없다

입력 2019.03.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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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3) 영원의 때




우리는 지난 시간 전도서 3장에 나오는 ‘때’에 대하여 살핀 바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 하지만 허무한 인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져 있다. 전도자는 1장부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선포한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본 자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생의 ‘허무’를 말하려는 것인가? 이것을 다 늙은 ‘노인의 지혜’로 읽는다면, 그렇다. 하지만 성서는 노인의 지혜가 아니라, 영원의 지혜다. 따라서 노인이 말한 것처럼 읽을 수 없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가 다시 온다. 노인은 한 세대 후에 태어난 젊은이가 인생에서 성취하지 못한 때에 대해 충고할 수 있다.

 

“젊은이, 너무 고민하지 말게. 춤출 때가 있으면 춤을 못 출 때가 있어. 그러나 인생을 살아보니, 춤출 때나 춤을 못 출 때나 다 똑같아. 그러니 춤추러 무도회장에 못 갔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게나.”

 

노인의 지혜는 계속해서 젊은이에게 춤출 때와 춤추지 못할 때를 평준화시키려 한다. 노인의 지혜가 낙심한 젊은이를 위로할 수도 있다. 연애에 실연당한 젊은이를 위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만약 영원(eternity)이 존재한다면, 과연 연애할 때나 실연당할 때를 똑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가 똑같은가?

 

이런 식으로 평준화시킨다면,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전 3:9)! 따라서 노인의 지혜는 혼란스럽다. 이 부분에서 전도서는 중요한 한 가지를 부각시킨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모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바로 이 지점이 인간이 자연 만물이 갖는 ‘때’와는 전혀 다른 때를 갖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말씀은 허무를 말하려는 것도 아니요, 노인의 지혜도 아니요, 영원의 지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영원의 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영원은 시간의 범주가 아니다.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 때를 갖는다면? 이 때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먼저 영원의 때를 파악하기 위해, 한 가지만 충고하자. 영원의 때를 변화 안에서 파악하려 하지 말라. 마치 평생을 살아가면서 변화하며 죽어가는 동물들처럼 파악하지 말라.

 

멀리 가지 못하는 바람이 영원히 순환하는 것처럼 영원도 그런 것처럼 말하지 말라. 강물이 바다를 다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영원도 마치 그러하다고 말하지 말라(전 1:6-7). 이런 것은 영원의 지혜가 아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것이 있다면, 영원에 대한 이야기는 달라져야 한다. 언제나 때를 갖는 무언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언제나 그렇다! 춤출 때가 있다. 춤을 출 수 있을 때는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고 사도가 말하듯이(살전 5:18), 언제나 그래야 하는 무언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때를 갖는 무언가는 친구로 고려되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때를 갖고 있는 일시적인 것과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영원은 지배적이다. 이 지배적인 영원은 자신의 때를 갖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때 지배적인 것은 실시적인 것이 때를 갖도록 허용한다. 따라서 성서는 선포한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마 23:23)”.

 

해야 하는 것을 할 때만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려 대상이 된다. 영원한 것도 마찬가지다.

 

세속적 지혜가 사람 속에 영원과 관계하는 것을 일시적인 것으로 바꾸려 한다면, 노인이 말했든 젊은이가 말했든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왜냐하면 영원과 관계할 때, 세월(나이)은 어리석게 말한 것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젊은이도 옳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누군가 경건이 일시적인 의미에서 어린 시절에 속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이 점점 축소되어 사라지듯, 경건 역시 그렇게 세월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경건은 보존할 수는 없지만 기억할 수 있는 행복한 마음의 상태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누군가 회개는 늙은 나이에 나약함으로 기력이 쇠하면서, 감각은 무뎌지고 잠은 더 이상 오지 않고 무기력만 증가할 때, 동반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악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물론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어린 시절의 경건을 잊어버리는 자가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속임을 당해 최고의 것을 빼앗기고 가장 건방진 자에 의해 기만당한다.

 

물론 노년기의 고통 중에 회개가 따라잡지 못한 자가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가 죄 지을 만한 힘이 없을 때 말이다. 그래서 회개는 늦을 뿐만 아니라 늦은 회개의 절망은 마지막 단계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영리하게 설명해야 하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인생은 악몽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영원과 관계할 때 사람이 천 살을 먹는다 해도, 영원만큼 늙을 수는 없다. 젊은이가 인생을 두려움과 떨림으로(빌 2:12) 이야기 하는 것과 다르게 말할 만큼 늙을 수 없다.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보통 인간의 언어는 아이가 어른처럼 행동하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처럼 생각하면, 성숙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때든 영원보다 더 자라길 바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영원한 파멸이라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해, 회개하기에 지나치게 늦은 때도, 지나치게 이른 때도 없다. 회개와 후회의 운동은 영원과 관계하는 정신의 운동으로 언제나 때를 갖는다.

 

다만 경건치 않는 자들의 삶은 “움직일 때마다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와 같을 것이다(시편 58:9)”.

 

이런 점에서 다음 시간에는 영원의 때인 회개와 후회의 운동을 살펴볼 차례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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